백두산 정상은 누구나 오를 수 있다. 하지만 백두산 '천지'는 누구나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2014년 11월에 오른 백두산 북파의 정상에서 만난 천지는 그 자리에서 수천 년 동안 늘 그랬던 것처럼 고요할 뿐이다. <주인 백>
[특별한 동행-북중접경지역 리포트] ⑨ 고구려(高句麗) 광개토태왕비
요즘 온 천지가 하얀 눈 세상이다. 정신없이 지내다 보니 북중접경지역을 다녀온 기억이 슬슬 가물가물해지려 한다. 11월 초순에 다녀온 뒤에 벌써 한 달이 넘어 지나가는 사이에 예산전쟁을 치르고, 장관 인사청문회까지 마쳤다. 그리고 12월 연말인 탓에 송년모임도 많고, 국정감사를 이유로 미뤄두었던 숱한 만남들을 이어가느라 나름 바빴던 탓이다. 하지만 그래도 기억을 더듬어 보자.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고구려 유적지' 지안(集安·輯安·집안)
지안에서 하룻밤을 머물면서 '진정구(金针菇·jinzhengu)'의 추억을 만든 밤을 보내고, 호텔에서 간단히 하루를 메모한 다음 잠자리에 들었다. 꿈에 '광개토태왕'이라도 만나봤으면 하는 마음으로...
'꼬로록' 하는 느낌이 알람보다 먼저 왔다. 밤 사이 만주의 추위를 견디기 위해 내 몸 위로 두텁게 쌓아올린 이불더미를 밀어냈다. 긴 호흡으로 몸을 깨워 샤워를 하고선 식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간 밤에 저녁을 먹고, '진정구'까지 배를 채웠건만 잠깐 눈을 붙였다 떼는 사이에 위가 비었나보다. 분명 잠결에 화장실 간 적도 없는데...
아침을 먹고나니 신호가 온다. 역시 기계적이다. 무언가가 들어가야 '만유인력의 법칙'에 따라 화장실을 찾게 되는 나는 자연에 무척이나 순응적인 인간이다.
하여튼 짐을 싸들고 밖으로 나오니, 조선족 안내인은 호텔 코 앞에 있는 성터가 고구려 '국내성' 터라고 한다. 그럼 우리는 간 밤에 고구려의 수도에서 잠을 잔 것인가? 가슴이 떨려왔다.
그런데 성터를 둘러보면서 드는 생각은 "설마, 이렇게 후지고 후진 모습으로 남아 있는 게 대륙을 호령한 고구려의 두 번째 수도였을까?" 사실 동명성왕인 주몽이 세운 졸본성에서 곧바로 아들인 유리왕이 국내성으로 천도를 했고, 이후 장수왕이 평양성으로 천도할 때까지 무려 400년 동안이나 대륙을 호령했던, 사실상 고구려의 원래 수도였다고 하기에는 너무 초라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 소개된 국내성의 규모는 둘레가 약 2,686m, 높이가 약 6m다. 그런데 눈에 보이는 성터의 흔적은 너무 초라했다. 마치 제주도 성읍민속마을에서 봤던 읍성 보다도 작게 느껴졌다. 아니 사전에 소개된 규모대로 성터가 남아 있다고 하더라도 너무 작다. 유리왕부터 장수왕시대까지 수많은 외침을 겪었던 국내성은 고구려의 수도로서 왕궁과 관청, 그리고 수 많은 군사가 머물렀을 것인데...
더구나 피난용이라는 '환도산성'과 비교해서도 평시에 고구려 태왕이 머물면서 나라를 다스리는 수도인 국내성의 규모가 지나치게 작다는 것은 의문이다.
위 지도의 이미지는 성헌식 역사칼럼니스트의 글('아시아대륙 지배한 제국의 왕 비석이 옮겨졌다')에서 가져왔다.
(위)·(가운데) 집안에 있는 국내성터 유적. 지나가는 행인의 키와 비교하더라도 너무 초라하고 작다. 오랜세월이 지나 심하게 훼손되었다고 생각해도, 고구려의 400년 수도의 성터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규모가 작다. (아래) 제주 성읍민속마을의 읍성 성곽모습. 왜적을 방비하는 목적으로 만들어져 군사훈련을 주로하는 변방의 작은 읍성이다. 그런데 고구려의 수도 성이 변방의 읍성만큼 작은 규모라는 건, 고구려의 수도로서 상상하기 어렵다.
지안(集安·輯安·집안)에서 만난 광개토태왕(廣開土太王)…대륙의 기억을 더듬다
우리는 버스를 타고 이동했다. 이날 일정에는 특별히 이곳 지안에 있는 조선족 고등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는 선생님이 안내인으로 동행했다. 그리고 안내인의 소개도 끝나기 전에, 호텔을 나선지 5분 정도만에 우리는 광개토태왕을 만날 수 있었다.
버스의 차장 밖으로 저만치에 광개토태왕비를 가둬놓은(?) 건물이 보였다. 버스에서 내린 우리 일행은 총총 걸음으로 뛰는 가슴을 억누르면서 광개토태왕비를 향해 다가갔다. 다가갈수록 웅장한 모습이 참으로 대단했다.
멀리서 찍은 사진을 보자니 그냥 평범한 비석들과 비교가 불가능했다. 그래서 다시 사람들이 있는 모습을 함께 찍었다. 그래야 그 크기가 실감이 될 것 같았기때문이다.
광개토태왕비(廣開土太王碑)는 위대한 고구려의 태왕, 19대 광개토태왕(好太王·호태왕)의 능비로, 높이가 6.39m(아파트 2~3층)에 이르고 무게가 37톤으로 추정되는 엄청난 규모를 갖고 있다.
414년 광개토대왕의 아들 장수왕(사후2년)이 세웠으며, 방추형의 응회암 자연석으로 만들어진 비석의 배면 너비는 1면(동남방)이 1.53미터, 2면(서남방)이 1.50미터, 3면(서북방)이 1.90미터, 4면(동북방)이 1.43미터 인 것으로 알려졌다. 비문은 모두 1,775자가 음각되어 있다.
태왕비를 받치는 대석은 현재 가로 2.7미터, 세로 3.35미터에 높이 약 20㎝ 정도 화강암으로 된 받침돌이 있는데, 정중앙이 아니라 한쪽 끝이 치우쳐져 깨져 있다. 비석에는 자연석의 형태 그대로 개석 (蓋石)이 없다.
비문은 현재 약 1,500여자 정도가 해석되어져 있는데, 고구려의 건국과정과 태왕의 대륙정복 이야기와 업적, 졸본에서 국내성으로 도읍지 천도 등의 이야기들이 기록되어 있다. 현재 태왕비는 중국 정부가 1982년에 대형 비각을 세웠으며, 2004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했다. 주변에는 민가가 있었다고 하지만 모두 이주하고, 공원으로 경관이 가꿔져 있다.
그러나 일부 재야 사학계에서는 태왕의 비가 현재 위치가 아닌 다른 곳에 있었고, 후에 누군가에 의해 이 곳으로 옮겨졌다는 의혹을 제기한다.('아시아대륙 지배한 제국의 왕 비석이 옮겨졌다')
하여튼 태왕의 비가 1,600년의 세월을 견디어서 후손들에게 들려주는 고구려의 이야기는 너무도 장대한 것만은 사실이다.
(위) 호태왕비의 웅장한 모습. (아래) 호태왕 비 앞에서.
호태왕비 앞에서 한 컷씩, 이 분들의 정체는 밝힐 수 없다. 왜? 초상권이 있으니까.^^
<계속>
[특별한 동행-북중접경지역 리포트] ① 잃어버린 북방영토에 들어서다
[특별한 동행-북중접경지역 리포트] ② 단동은 '안동도호부'에서 유래된 땅
[특별한 동행-북중접경지역 리포트] ③ 중국 관광상품이 된 북한
[특별한 동행-북중접경지역 리포트] ④ 대륙의 아침은 신의주의 태양에서 시작된다
[특별한 동행-북중접경지역 리포트] ⑤ 북-중 국경이 맞닿은 땅 '황금평'
[특별한 동행-북중접경지역 리포트] ⑦ 고구려 혼(魂)을 만나러 가는 길
[특별한 동행-북중접경지역 리포트] ⑧ 집안(集安)의 추억, "진정구"
[특별한 동행-북중접경지역 리포트] ⑩ 광개토태왕과 '태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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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사진=소장환(free57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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