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 정상은 누구나 오를 수 있다. 하지만 백두산 '천지'는 누구나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2014년 11월에 오른 백두산 북파의 정상에서 만난 천지는 그 자리에서 수천 년 동안 늘 그랬던 것처럼 고요할 뿐이다. <주인 백>
[특별한 동행-북중접경지역 리포트] ⑩ 광개토태왕과 '태왕릉'
중국인들은 '광개토태왕비'와 '장군총'을 '동방의 비석'과 '동방의 금자탑'이라고 불렀다. 얼핏 듣기에는 우리의 조상들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게끔하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면 역시 그들의 '상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덧붙여서 고구려를 중국의 변방 소수민족 정권이라고 주장하는 '동북공정'을 감안한다면 동방의 금자탑을 만든 고구려를 변방 정권으로 거느린 중국은 더 대단하다는 뜻을 내포한 '중화사상'의 연속선상이라는 느낌이다.
집안 우산묘구 541고분, 그리고 '태왕릉'
거대한 광개토태왕의 비를 보면서 뿌듯함과 안타까움이 교차했다. 우리는 만주라는 땅도 잃고, 역사마저도 뺏기고 있다는 생각때문이다. 아마도 태왕비를 바라보는 한국사람은 다들 비슷한 감정을 갖겠지.
태왕비에서 발길을 옮겨 멀리 보이는 동산처럼 보이는 돌무더기를 향했다. 그 돌무더기 동산은 '광개토태왕릉'이라고 했다. 대륙을 정벌하고, 중국을 벌벌 떨게 했던 광개토태왕이 여기에 잠들었다니. 그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먹먹해졌다.
다만 태왕의 릉을 크다고 해야할지, 작다고 해야할지 고민이 됐다. 중국 역사에서 최초의 통일왕조를 세웠다는 진(秦)나라 시황제(始皇帝). 우리가 흔히 '진시황'이라고 부르는 그의 무덤은 그 규모가 어마어마하지 않은가. 중국 특유의 '과장'이 있기는 하겠지만, 흙으로 구운 병사와 마차 등 군대를 그대로 재현한 진시황의 무덤은 여전히 발굴이 진행중이라고 할 만큼 '미지의 세계'나 다름없다. 그에 비하면 진시황제와 견주어 뒤지지 않는 대제국을 만든 광개토태왕의 무덤은 너무 초라한 느낌이었다.
(위) 돌무더기처럼 남은 태왕릉의 현재 모습. (아래) 태왕릉에서 바라 본 태왕비.
우리는 안내인을 따라 무너져가는 태왕릉 위로 만들어진 돌계단을 따라 올라갔다. 거대한 규모의 돌들은 모두 유실되고, 돌무더기 속살을 그대로 드러낸 태왕의 무덤은 '광개토태왕'이라는 웅장한 이름과 달리 너무도 초라하고 허전했다.
묘실 입구에서 바라보면 저만치 태왕비의 비각이 보였다. 이 곳이 태왕의 무덤이라는 근거는 태왕비가 근처에 있고, 발굴 과정에서 "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원태왕릉안여산고여악)"라고 쓰인 돌이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를 안내한 조선족 고등학교 교사는 이 무덤에서 "千千歲 好太王(천천세 호태왕)"이 쓰인 벽돌이 발굴됐다고 했다.
"萬萬歲 好太王(만만세 호태왕)"이 아닌 '천천세 호태왕'이라는 것은, 천자(天子)인 중국 황제만이 "萬萬歲(만만세)"라는 말을 쓸 수 있다는 논리가 무언중에 들어 있었다. 하지만 그 시절 광개토태왕은 중국을 정벌하고 스스로 연호를 복원하여 '영락(永樂)'이라는 연호가 대외적으로 사용됐었다. 조선족 교사의 입에서 '천천세 호태왕'이라는 말을 들으면서 왠지 거북하게 느껴졌다.
조선족 교사는 "인구 23만의 집안은 4,000년 역사를 가진 오래된 도시이고, 2,000년 전 고구려 역사가 있는 땅으로 2004년에 유네스코에 등재됐다"면서 "약 13,000개의 고분이 있었는데 현재는 7,600개 정도가 남았고, 이 마저도 97% 고분이 모두 도굴됐다"고 설명했다. 유창하게 설명하는 그를 보면서 조선족으로서 '한(韓)'의 느낌보다는 그냥 한국말 잘하는 중국인처럼 느껴졌다.
아무튼 그를 따라서 올라선 태왕릉의 묘실은 텅비어 있었다. 이 무덤의 주인은 온데간데 없고, 후대에 남은 사람들만이 주인을 태왕이라고 추정할 뿐이었다. 특히 청나라시대 봉금지역이었던 이 곳의 고분들은 대부분 일제시대때 도굴을 당했고, 일본군이 1945년 태평양 전쟁이 종료되어갈 무렵 태왕릉의 입구를 찾지 못해 폭탄으로 폭파시키는 무자비한 '공개도굴'을 했다고 한다. 이후 1966년 통구 고분군을 전면 재조사하면서 중국정부는 '우산묘구 541호 고분'으로 정리했다.
돌무더기 속살이 드러난 태왕릉을 가로질러 상부 묘실까지 정돈된 돌계단이 설치되어 있다.
(위)묘실 입구 모습. 인공적으로 재단장 모습이다. (아래) 태왕릉의 묘실 내부모습. 무덤의 주인들은 없다.
(위)(가운데)(아래) 태왕릉의 속살로 채워졌을 돌무더기들이 그대로 노출돼 있다.
'태왕릉'의 주인은 광개토태왕일까
태왕릉을 보면서 그냥 주인을 알 수 없는 우산묘구 '541호 고분'일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아시아를 떨게 했던 태왕의 무덤이라기엔 너무 초라하니까.
거대한 태왕 비문에도 "甲寅年 九月甘九日乙酉 遷就山陵 於是立碑 銘記勳績"라는 기록이 있다. 414년(갑인년) 9월 29일 을유날에 태왕을 산릉에 모시고 비를 세워 훈적을 기록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태왕릉이라는 541호 고분은 산릉이 아닌 평지에 있는 능이 아닌가.
이리저리 검색을 해봐도 현재 학계에서도 '태왕릉'이라는 설이 많다. 특히 정통사학계는 그렇게 보고 있다. 그러나 재야 사학계에서는 다른 견해들이 나타난다. 재야사학계는 정통사학계라고 불리는 역사학계 자체가 식민사관을 만들어낸 이병도의 제자들이 중심이 되어 형성되었기때문에 우리 역사에 대한 인식의 전제부터가 다르다는 것이다.
재야에서도 '환단고기'나 '남당유고'의 가치를 평가하는 사람들은 우리의 고대역사를 놓고 정통사학계와 대단히 다른 견해를 내놓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정통사학계에서는 '단군신화'라고 말하는 단군조선의 이야기를 재야사학계에서는 실존 역사로 인식하고 있다. 다만 이병도는 훗날 저술한 '한국상고사 입문(이병도·최태영 공저)'에서 단군조선은 신화가 아닌 실존역사라고 했다.
지금에 와서 오래되고 오래된 고대사의 진실에 대해 누가 알 수 있겠는가. 어쩌면 역사는 우리가 마음 속으로 바라는 모습인지도 모르겠다.
하여튼 우리는 잠시 버스를 타고 고구려 제20대 장수왕릉으로 추정된다는 '장군총'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계속>
[특별한 동행-북중접경지역 리포트] ① 잃어버린 북방영토에 들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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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사진=소장환(free57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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