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 정상은 누구나 오를 수 있다. 하지만 백두산 '천지'는 누구나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2014년 11월에 오른 백두산 북파의 정상에서 만난 천지는 그 자리에서 수천 년 동안 늘 그랬던 것처럼 고요할 뿐이다. <주인 백>
[특별한 동행-북중접경지역 리포트] ⑪ 동북아의 피라미드 '장군총'
텅 빈 '태왕릉'을 뒤로 하고 우리 북중접경답사 일행은 다시 버스를 타고 잠시 이동했다. 주변에는 지안현에 사는 중국인들이 '민속촌'이라는 이름을 걸고 살고 있었다. 하지만 민속촌이라고 할 것은 그닥 보이지 않고, 집집마다 가을걷이를 마친 옥수수를 말리는 풍경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에게 광개토태왕이 누구인지, 장수태왕이 누구인지는 아무런 관심대상이 아닌 듯 했다. 그저 한국에서 오는 관광객들이 돈벌이 수단일 뿐.
동북지역 피라미드 '장군총'…우산하1호분(禹山下一號墳)
고구려 제20대 태왕 장수태왕. 광개토태왕의 아들. 흔히들 장군총은 장수태왕의 무덤으로 여기고 있다. 이 곳이 알려진 것은 1905년 일본인 학자 도리이(鳥居龍藏)가 처음으로 현지조사를 하면서부터라고 한다.
사실 이 곳의 주인을 정확하게 알 수는 없으나, 태왕릉과 광개토태왕비가 가까이 있는 점으로 미뤄서 광개토태왕의 아들인 장수태왕의 릉으로 추정하는 것이다.
구글어스에서 캡처한 태왕릉-광개토태왕비-장군총의 위치를 비교한 위성사진
우리를 안내한 조선족 고교 교사인 안내인은 '장군총'이란 명칭의 유래가 중국사람들이 변방지역을 지키는 장군의 묘라고 생각한 데서 비롯됐다고 했다. 고구려식인 '방단계단식 돌무덤'으로 7계단 22층 규모라고 설명했다. 한 변의 길이가 31.58m로 네 변이 모두 같다는 것과 높이는 31m 규모라고 말했다. 묘실 위에 덮개석의 무게만 50톤에 이르고, 무덤을 만드는데 걸리는 시간을 대략 20년 정도라고 추정할 때 고구려의 국력이 가장 강성했던 당시에 축조된 것으로 예상했다. 설명을 이어가던 조선족 안내인이 질문을 던졌다.
"장수왕은 국내성에서 평양성으로 천도했고, 그 곳에서 죽었는데 왜 무덤이 이 곳에 있을까요?"
그러게나 말이다. 왜 그랬을까? 재야 사학계에서 이병도식 '강단 사학'이라고 비판하는 역사를 우리는 학교에서 달달 외우면서 배웠다. 장수왕은 평양천도를 해서 한반도로 영역을 넓히면서 광개토태왕에 이어서 고구려의 가장 넓은 제국을 완성한 군왕으로 배웠다. 만주에서 평양으로 간 장수태왕이 사후에는 평양에서 만주까지 다시 와야 할 이유가 있을까.
조선족 안내인은 '귀장(歸葬)무덤'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두 가지 이유를 말했다. 첫째는 조상들의 묘가 이 곳에 있으니, '세장지지(世葬之地)'라는 것이다. 흔히 말하는 '선산(先山)'에 장사를 지낸 것이라는 말이다. 둘째는 용감한 전사의 후예인 고구려의 풍습이 태어나면서 무덤을 만드는 전통이 있는데, 장수태왕 역시 국내성에서 태어나면서 이 곳에서 무덤을 만들기 시작했기 때문에 사후에 이 곳에 장사를 지냈다는 것이다.
길림성 집안현 통구에 있는 장군총의 전경.
장군총의 진짜 주인은 누구일까…'들여쌓기 공법' 고구려 성과 무덤 공통 양식
조선족 안내인은 역사 교사인 모양이다. 귀장무덤 이야기와 더불어 학계에서 장군총의 주인을 장수태왕이 아닌 동명왕릉으로도 보는 견해에 대해서도 소개해줬다.
동명왕릉이 북한(평양시 역포구역 용산리)에도 있는데, 그 이유는 시조의 묘는 고구려 수도의 천도마다 따라 다녔다는 것이다. 그래서 원래 졸본에 있던 주몽의 무덤은 국내성으로 천도하면서 옮겨왔고, 국내성에 있던 동명왕의 무덤이 '장군총'일 것이라는 추측이다. 두 가지 이유는 첫째 태양이 가장 잘 비추는 양지바른 곳에 있고, 둘째 장수태왕은 호태왕(광개토태왕)의 아들이기 때문에 무덤이 태왕릉보다 높은 곳에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이 곳을 1905년에 발굴한 뒤로 일본 학자들 사이에서는 장군총의 주인이 광개토태왕이라는 설과 장수왕이라는 설, 그리고 고구려 10대 산상왕일 것이라는 주장까지 혼재되어 있다. 하지만 발굴 당시 무덤에는 아무런 유물이 없었다. 이미 다 도굴당한 상태였다. 진짜 주인에 대한 궁금증은 역사의 미스테리로 남았다.
이와 달리 어떤 이들은 장군총은 고구려 고분이 아니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고구려 고분들이 갖고 있는 가장 큰 특징인 벽화가 없다는 것이다. 영락 18년, 그러니까 광개토태왕 즉위 18년에 죽은 유주자사의 무덤에도 벽화가 있는데, 태왕의 무덤에 벽화가 없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태왕릉이나 장군총은 고구려의 고분이 아니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장군총의 주인이 동명태왕이든, 광개토태왕이든, 장수태왕이든, 혹은 또다른 누구든 간에 우리가 팩트(fact)라고 꼽을 수 있는 것은 돌을 쌓는 기법이 고구려식 적석총 양식이라는 것. 가장 큰 특징은 들여쌓기. 조선족 안내인은 '이빨식 공단기법'이라고 소개했다. 성을 쌓을 때도, 거대한 돌무덤을 쌓을 때도 공통된 방식이다. 아랫돌 위에 윗돌을 쌓으면서 조금씩 안으로 들여 쌓게 되면 거대한 돌들이 서로 물리면서 무게를 분산시킬 뿐만 아니라, 세월이 갈수록 맞물려가면서 더욱 튼튼해지는 특징이 있다.
다만 이러한 돌쌓기 양식이 고구려만의 전매특허는 아니라는 지적도 있다. 이런 양식은 산성을 쌓았던 우리 조상들이 고조선시대부터 창안해낸 것이라는 주장이다. 성을 쌓을 때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를 이용하기때문에 평지에서는 토성을, 산에서는 석성을 쌓았다는 것이다.
(위) 장군총의 큰 돌들이 들여쌓기 공법으로 쌓아올려진 모습. 특히 윗돌을 아랫돌보다 조금씩 안쪽으로 들여 쌓기를 하면서 돌을 깎아 맞춰서 무게에 의해 밀려나지 않도록 한 특징이 눈에 띈다. (아래) 장군총의 네 면에는 약 5미터 가량의 호분석을 3개씩 기대어 놓았는데, 북쪽면에는 1개가 유실됐다. 유실된 면에서는 군데군데 훼손되면서 내부에 채워넣은 돌들이 흘러나오는 모습.
고구려시대 석공기술 수준을 지금에 와서 가늠할 수는 없겠지만, 현재와 같은 그라인더(grinder)도 없던 시절에 큰 돌들을 깎아서 끼워맞춘다는 건 놀랍다. 장군총의 둘레를 돌아보면서 그 거대함에 조상들의 위대함에 자긍심을 느끼는 동시에 이제는 중국 땅이 되어버린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 교차했다.
그 진한 아쉬움을 장군총 앞에서 사진 한 컷에 남기는 것으로 위안 삼았다.
장군총에서 아쉬움을 뒤로하고 발걸음을 옮기는데, 가까운 곳에 장군총 1/4 크기인 배총(陪冢-딸린 무덤)이 있었다. 원래 배총은 모두 5기였다는데, 남아 있는 것은 1기 뿐이다. 배총의 주인 역시 누구인지 알 수 없으나, 조선족 안내인은 왕의 비(妃)일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것은 틀린 말 같다. 왕의 비라면 왕과 함께 묻혔을 것이기때문이다. 그렇다고 장군총의 주인과 아무런 연관이 없는 것 같지는 않고, 왕의 부인 반열에 오르지 못한 여인들 일지도 모르겠다. 하여튼 배총에는 무언가 모를 한(恨)이 있는 것도 같다.
(위) 배총의 전경. 장군총을 주변으로 배총이 있는데, 조선족 안내인은 고인돌의 형태가 아니라 무덤이 유실되면서 훼손된 것이라고 했다. (아래) 배총의 덮개 돌 아래쪽에는 홈이 파여 있는데, 이슬이 맺히거나 비가 올때 물이 무덤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우리는 배총을 돌아 근처에 있는 오회분오호묘(五盔墳五號墓)를 둘러봤다. 중국측 감시원의 매서운 눈초리에 사진은 하나도 찍지 못했다. 그러나 감시의 눈길이 아니더라도 너무 어두워서 사진을 찍을 수 없었다. 플래쉬를 터트리면 벽화도 훼손되겠지만 순간적으로 지나치게 밝아져 벽화가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그냥 어둠에서 찍자니 삼각대도 없고 장노출에 흔들려서 화질이 제대로 나올 수 없다. 그래서 그냥 깨끗이 포기했다.
땅 속으로 한 참을 걸어들어간 묘실 안에서 안내인으로부터 주작, 현무, 백호, 청룡의 사신도와 무덤 주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신기하기만 했다. 그리고 묘실의 천정에는 우주의 별자리를 그려서 '야명주'를 박아 반짝거리게 했었는데, 모두 도굴됐다는 설명 부분에서는 무덤이 참 낭만적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자신의 무덤자리에 하늘의 천체를 그렸을 무덤 주인의 호방함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오회분오호묘까지 둘러본 우리는 버스에 올라 환도산성(丸道山城)으로 향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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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사진=소장환(free57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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